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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금화언니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의 특산물은 쌀이다. 중국어로 "우창따미"라고 말하는 오상 흰쌀은 베이징을 비롯한 대 도시의 관료들과 부자들만 먹는다고 했다. 쌀의 질이 좋고 그래서 값이 비싸다는 얘기다. 오상에서 생산되는 쌀은 생긴 것도 다른 지방의 쌀과 차이가 난다. 다른 지방의 흰쌀보다 1.5배 정도 길쑴하게 생겼다. 오상 흰쌀로 밥을 지으면 찰기와 담백함이 어우러진 유별난 맛을 낸다. 오상시 주변의 무연한 벌은 땅이 비옥하기로 중국에서도 소문이 난 고장이었다.

 

내가 팔려간 오상시의 주변 농촌부락은 한족(중국의 주류민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족들은 몇 집밖에 없었다. 끝이 안보이는 무연한 벌의 한 가녘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부락이었다. 이백가구 남짓한, 그닥 크지 않은 그 부락에 북한에서 온 여자들이 일곱명 씩이나 있었다. 모두 팔려온 여자들이었다. 북한에서 팔려온 여자들은 처음 한 달은 바깥 출입을 못한다.

 

주인들은 북한여자들이 도망칠까봐, 혹은 이웃이 경찰에 고발할까봐, 집안에 가두어 두고 있다가 나중에 안심이 되면 연변조선족 자치구 지역에서 데려온 여자라고 동네에 이야기하며 바깥 출입을 시킨다. 물론 북한에서 온 여자들도 중국연변의 농촌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 나도 그랬다. 처음 한 달동안은 밖에 나가지 못했다. 주인은 집에서 나갈때면 밖에 자물쇠를 잠그군 했다. 그래서 부락에 북한여자들이 일곱명씩이나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집안에 갇혀 중국인 주인의 옷을 빨아주거나 밥을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내가 제일 두려워한 것은 임신이었다.  나는 첫날부터 나이가 28살이나 많은 중국인 주인에게 농락을 당했지만 머릿속으로 임신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비록 팔려다니는 몸이지만 어느때인가는 나도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할수록 인간처럼 살고싶은 그 욕망은 더욱 간절해 지군 했다. 나는 그집에 도착한 날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를 중국돈 1만원(당시 환율로 1240달러)에 사서 데려온 사람은 농민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추이 궈파 라고 불렀다. 한국어로 발음하면 최국발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12년 전에 러씨야로 돈벌러 갔다가 죄를 짓고 1년전에 도망쳐온 사람이었다. 그의 마누라는 러시아에 그냥 남아 장사를 한다고 했다.

 

후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말이지만 그는 1년 사이에 북한여자를 두명씩이나 돈을 주고 데려왔다고 했다. 돈을 주고 데려와서 몇 달을 데리고 살다가는 팔고, 그 돈으로 또 여자를 데려왔다가는 몇 달 후에 다시 팔아버렸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돈은 손해보지 않으면서 북한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수법이었다. 그에게 북한여자들은 장사물건에 불과했다. 

 

그는 집값이 싼 농촌부락에 자리를 잡고 아내가 러시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마작을 놀거나 동네 건달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게는 열네살짜리 딸이 있었다. 그애는 오상시의 친척집에 나가 살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애는 한 달에 두번정도 집에 오군 했는데 올때마다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듯 멸시의 눈길로 나를 보군 했다.

 

나는 지금도 돼지고기를 비롯한 기름진 음식을 포식하는 사람들을 보면 10년전 나를 데려갔던 중국인주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협오감이나 거부감 비슷한 것을 느끼군 한다. 그는 돼지고기를 엄청 좋아했다. 매일같이 돼지고기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그는 때때로 건달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내가 오상시의 농촌부락에 팔려간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중국인 주인은 건달 친구를 한 명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중국말을  모르는 나를 옆에 앉히고 술잔에 술을 따르게 했다. 그들은 이상한 눈길로 나를 흘금흘금 쳐다보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무엇인가 의논하는 것 같았다. 징그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킥킥 웃기도 했다. 후에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마 나를 다시 팔아버릴 의논을 한 것 같았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킥킥웃으며 이야기를 하던 주인남자의 건달친구는 별안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손을 뻗쳐 옆에 앉아있던 나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나중에 서슴 없이 젖가슴을 움켜쥐고는 웃으며 "하이싱. 나이즈 타이 따"(괜찮아. 젖가슴이 크다)라는 말을 뇌까렸다. 중국인 주인은 그것을 보고도 웃었다. 나는 그들에게 성 노리개에 불과했다.

 

쉬운 중국말은 조금씩 알아들었던 나는 젖가슴을 움켜쥔 사내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다음 악에 받쳐 "개새끼"라고 소리질렀다. 나는 나에게도 그런 배짱이 있는 줄 몰랐다. 항상 불안해서 가슴을 조이며 살던 나의 입에서 어떻게 "개새끼"라는 욕설이 마구 튀어 나올 수 있었는지 나도 몰랐다. 어째든 그 날 나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다음 날이었다. 중국인 주인은 뒷집에서 살고 있는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왔다. 북한여자였다. 그때 나는 처음 뒷집에도 북한여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중국말을 잘했다. 중국인 주인은 그를 데려다가 자기의 말을 나에게 통역해달라고 부탁 했다. 그의 말이라는 것이 자신은 나를 돈을 주고 사온 주인이라는 것, 다시 소리를 지르며 접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죽여버릴 것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나도 어린 나이에 임신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는 말을 했다. 중국인 주인도 내가 임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음 날 중국인 주인과 뒷집에서 살고 있는 언니는 나를 데리고 오상시에 갔다. 작은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피임을 하도록 했다. 돌아오는 길에 뒷집언니는 중국인 주인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기회를 봐서 도망쳐라. 너에게는 그길밖에 없어"

 

뒷집에서 살고 있는 언니의 이름은 금화였다. 나이는 서른 여섯살이었다. 그의 고향도 나와 같은 무산군(북중국경지역)이었다. 그후부터 나는 틈만 있으면 뒷집의 금화언니를 찾아가군 했다. 그는 4년전에 팔려왔다고 했다. 그의 중국인 남편은 비교적 무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들처럼 몸집이 작았다. 대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 자신도 외모가 볼품없고 돈도 없는 처지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부지런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듯 했고, 금화언니가 아니었다면 평생 장가를 못가고 살았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듯 했다. 그는 금화언니를 잘 대해줬다.
 

그들 사이에는 예쁘게 생긴 딸이 있었다. 금화언니가 북한여자들 중 나이가 제일 많아서인지, 아니면 금화언니의 남편이 무던한 사람이어서인지 북한여자들은 자주 그의 집에 모여서 이야기들을 나누군 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북한여자들은 금화언니의 집에와서 속을 터놓군 했다. 그들 속에는 다섯번씩이나 팔려다니다가 온 언니도 있었다. 그의 손목에는 자살을 하려고 칼로 동맥을 끊었던 상처자리가 있었다.

 

나는 금화언니의 집에 자주 가면서 동네에 팔려온 다른 북한여자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 곧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중국경찰들이 부락에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을 조이며 살았다.

 

남자에게서 매를 맞으며 사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번 억울한 울음을 울고는 다음 날부터 아무일 없었던 던 것처럼 군말없이 남자를 섬기는데 습관되어 있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팔려간 북한여자들의 삶이기도 했다.

 

나는 2003년 설을 그곳에서 보냈다. 설날 저녁, 북한여자들은 모두 금화언니의 집에 모여 놀았다. 서로 살아온 과거를 이야기하며 맥주도 마셨다. 나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온 후 그날 처음 소리내어 웃어보았다. 오랫만에 소리내서 웃어보다가, 문득 웃기에는 나의처지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중에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싸쥐었다.

 

나는 그날 오랫동안 울었다. 소리를 죽여가며 울다가 눈물을 닦으며 머리를 쳐들어 보니 언니들도 모두 울고 있었다. 울음 소리가 거의 끝날무렵에 금화언니는 흐느낌에 젖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그만하자. 살다보면 좋은 날도 생기겠지"

 

*** 후에 그 부락에서 살던 북한여자들은 모두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금화언니는 중국경찰들이 부락으로 들이닥치자 죽으려고 농약을 먹었다. 중국경찰은 농약을 먹은 금화언니를 병원으로 싣고가서 한 주일 동안 치료해주고 북송했다 ***

 

                   [계 속 ]

                                           신영희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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