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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Korea.jpg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된 탈북여성들.

 

3, 우리는 악당들의 사냥감이었다.

 

나는 그해가을, 정확히 2002년 9월 나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한 중국인 농민에게 팔려갔다. 몇개월 동안 나를 농락한 조선족 주인은 마누라의 독살스러운 눈길에 지친듯 인신매매범들에게 나를 넘겼다. 그는 애초에 인신매매범들에게 나를 팔아먹으려고 데려왔었다. 그리고 4개월 동안 더러운 야욕을 채우고나서 인신매매범들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팔려가는 것도 절차가 있었다. 어느 날, 조선족 주인의 집에 젊은 두 남자가 찦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조선족 주인의 조카였다. 역시 조선족 주인처럼 살집이 좋은 사내였다. 조선족 주인과 다른 것이 있다면 눈이 작은 것이었다. 짧은 머리에 작은 눈이 매서운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첫인상에도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냥 평범해 보였다. 특징이 있다면 키가 크고 바짝 여위였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중국사람들은 잘 먹고 사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랐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은 짚차에 나를 태우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시로 떠났다.

 

그들도 처음엔 꽤 친절해 보였다. 그들은 차 안에서 나에게 아픈데가 없냐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임신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임신한 상태였다. 몇 개월 동안 조선족 주인의 파렴치한 농락을 당하면서 임신까지 한 것이었다. 조선족 주인은 내가 임신 한 것을 알고도 그냥 팔아버렸다.

 

조선족 주인의 조카는 작은 눈을 희번득거리며 자기의 삼촌을 욕했다. "음흉한 나그네 새끼(중년 남자들을 비하하는 연변지역의 방언), 그 나그네 새끼 원래 버릇이 더럽다"


그들은 연길시의 교외에 있는 크지않은 외딴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며 살펴보니 멀지 않은 곳에 교회의 십자가가 있었다. 내가 들어간 집에는 이미전에 온, 세명의 북한 여자들과 그들을 지키는 한 조선족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날 세명의 북한 여자들과 밤을 보냈다. 모두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왔다가 잡혀온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나이가 24살인 처녀도 있었다. 고향이 청진인(나는 그를 청진 언니라고 불렀다)그는 1년전에 중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용정시의 한 식당에서 1년 동안 일하다가 식당주인이 마치 생각해 주는 척, 좋은 곳으로 시집이나 가라면서 인신매매범들에게 넘겼다고 했다. 중국에서 1년 동안 잘 먹어서인지, 아니면 숙성한 처녀여서인지 그는 살결이 부드러웠다. 늘씬한 몸매에 얼굴도 예뻤다. 그는 자기가 전에 일했던 식당의 주인을 짐승같은 놈이라고 욕했다.

 

나머지 두 여자들은 시집까지 갔던 아줌마들이었다. 한 여자는 연사군(북한의 북중 국경지역)에서 왔는데 그는 몇 달전에 딸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감옥에 가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에서 인신매매범들에게 걸려들면 팔려간다는 것을 북한에서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자포자기한 듯, 팔려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까짓것 딸까지 굶겨 죽인년이 못할짓이 뭐 있냐"  그의 나이는 서른네살이었다.

 

다른 한 여자는 고향이 함경북도 회령(북한의 북중 국경도시)이었다. 그는 5년 전에 중국으로 왔다고 했다. 5년 전에 중국으로 와서 안도현에 있는 한 농민에게 팔려갔다고 했다. 팔려가서 아들까지 낳고 살다가 중국경찰에 잡혀 북송되어 1년동안 감옥에 갔다왔다고 했다. 감옥에 갔다온 후 다시 도망쳤는데 두만강을 건너와서 인신매매범들에게 잡힌 것이었다.

 

그의 중국인 남편은 농민인데 소를 키운다고 했다. 인신매매범들은 그에게 중국 돈 이천원(당시 환율로 250달러)을 가져오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중국인 남편에게 연락해서 돈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남편에게는 돈이 없다는 말로 인신매매범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인신매매범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나서 그들이 없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남편이 소 한 마리만 팔면 될텐데". 그의 남편은 소를 다섯마리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남편에게 연락하면 과연 그가 소를 팔아 그 돈을 가지고 자기를 데리러 오겠는지,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남편이 자기를 위해 소까지 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팔려가서 아이까지 낳아주고 살았지만 그의 중국인 남편은 그를 소 한 마리 값만치도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 비참한 인생이었다. 그는 인신매매범들에게 팔려간 다음 그 곳에서 다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옆방에서 듣지 못하게 조용조용 말했다.이야기 도중에 옆방에 있던 중국조선족 주인의 조카, 눈이 작은 사내가 우리방으로 들어왔다. 작은 눈의 사내는 제법 친절한 눈길로 우리를 둘러보더니 청진언니에게 손가락을 까딱 흔들어 보였다. 옆방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청진언니는 짧은 한 숨을 쉬고나서 말없이 따라나갔다. 잠시후 옆방에서 청진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그 다음에는 귀뺨을 때리는듯 철썩 소리와 함께 "니, 내 말을 안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는, 느릿느릿 하면서 포악함이 묻어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교성의 거친 숨소리가 옆방을 꽉 채우는듯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회령 아줌마는 입술을 사려물고 "개같은 새끼"라는 말을 씹어뱉었다. 청진언니는 두시간이 넘어서야 우리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는 창피한 듯 머리를 수긋하고 약간 비칠거리며 들어와 말없이 담요를 뒤집어 쓰고 누웠다.

 

다음날, 인신매매범들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작은 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서 낙태를 시켰다. 임신한 여자는 팔아먹기가 어렵거나, 팔아먹을 때 값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난생처음 술을 마셨다. 나를 임신시킨 중국조선족 주인을 증오하면서, 어린 나이에 여지없이 농락당한 자신이 너무 치욕스럽고 억울하여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셨다.

 

인신매매범들은 북한여자들을 토끼라고 불렀다. 내가 연길시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옆방에서 전화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작은 눈의 사내는 급히 옆방에서 자고 있는 두명의 짝패를 소리쳐 불렀다. 그 집에는 여러개의 방이 있었는데 판자로 칸막이를 했다. 잠 잘때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집이었다. 작은 눈의 사내는 잠이 채 깨지 않은 듯 느릿느릿 일어나는 두 명의 짝패에게 말했다. "로과촌에 토끼가 한 마리 들어왔다" 로과촌은 두만강 유역의 작은 중국 부락이었다.

 

그들은 잠시 쑥덕거리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큰 소리로 지껄였다. "그 나그네 우리한데 넘긴 토끼가 이젠 열 마리두 넘을 거다. 이번에는 돈을 좀 주자" "그래야지. 그 나그네 한데 신세를 많이 졌다"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오는 토끼(북한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두만강 유역의 농촌들에 연락망을 늘여놓고 있었다. 그들은 짚차를 타고 두만강 유역으로 떠났다. 한 사람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날 밤, 아홉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북한여자를 한 명 데리고 기분이 좋아 돌아왔다. 인신매매범들을 따라온 여자는 자기가 함정에 빠진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국경을 무사히 통과 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얼굴에 미소까지 담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마치 친척집에라도 온듯 집안을 둘러보다가 우리들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그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옆방에는 포악한 인신매매범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후에 회령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어데서 왔냐고 물었다. 새로온 여자는 무산군(북한의 국경지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이는 몇 살이요" 다시묻는 회령아줌마의 물음에 새로온 여자는 스물 여섯살이라고 대답했다. 그도 처녀였다. 그는 자기의 고모가 연길시 교외의 농촌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친척을 만나러 두만강을 건너왔다가 인신매매범들에게 걸려든 것이었다.

 

우리들의 방에 들어왔던 무산언니는 차츰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한 듯 얼굴빛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을 더듬어보는듯 말없이 서있던 무산언니는 옆방으로 갔다. 옆방에서 곧 다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산언니는 친척집에 가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고 인신매매범들은 가지 못한다고 막았다.

 

인신매매범들은 무산언니에게 가겠으면 돈을 내놓고 가라고 했다. 자기들이 두만강 유역의 농촌에서 연길까지 데려다준 값을 내라는 것이었다. 무산언니가 얼마를 줘야 되냐고 묻자 2천원을 내라고 했다. 날강도 들이었다. 당시는 중국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평균 천원도 안될 때였다. 무산언니는 울먹이며 사정했다. 돈은 앞으로 꼭 갚겠으니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인신매매범들은 파렴치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애원하는 무산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근심할 것 없다. 한 번 시집을 갔다오면 된다. 우리가 보내는데로 가서 한 달쯤 살다가 도망쳐라. 그러면 된다" 나중에 무산언니는 악에받쳐 접어들었다. "당신들이 뭔데, 내가 당신들한데 무엇을 잘못했냐"고 소리질렀다.

 

인신매매범들은 악당들이었다. 무산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 접어들자 서슴없이 폭행했다. 나중에 무산언니를 끌고 우리들의 방으로 들어왔다. 작은눈의 사내는 창문가에 무산언니를 밀어붙여 세워놓고 으르렁 거렸다. "다시 한번 소리를 질러봐라" 무산언니는 아무말도 없이 작은눈의 사내를 무섭게 쏴봤다. 작은눈의 사내는 무산언니의 쏴보는 눈길이 어이없다는듯 피씩 웃었다. 그리고는 창문턱에 놓여있던 도라이버를 집어들었다.

 

작은눈의 사내가 무산언니를 우리방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창문턱에 도라이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도라이버를 집어들고 서슴없이 휘둘렀다. 작은눈의 사내가 휘두른 도라이버는 무산언니의 볼을 깊숙히 뚫고 들어갔다. 무산언니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도라이버가 박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싸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작은눈의 사내는 도라이버 손잡이에 힘을 주어 무산언니의 볼편을 꿴채로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무산언니는 마치 사슬에 목이 조인 개처럼, 코꿰인 송아지처럼 도라이버가 끄는대로 끌려갔다.

 

작은눈의 사내는 방안을 한바퀴 돌고서야 무산언니의 볼편에서 도라이버를 와락 뽑았다. 그제야 무산언니는 비명을 질렀다. 주저앉아 피가 떨어지는 볼편을 싸쥐고 소리내어 울었다. 작은눈의 사내는 공포에 질려있는 우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이 여자를 처치해주고 방바닥의 피를 싹 닦아라" 그제야 우리는 우르르 일어나 무산언니에게 다가갔다.

 

작은 눈의 사내는 10분쯤 지난후에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저앉아 울고 있는 무산언니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그의 손에는 그때까지 도라이버가 쥐여 있었다. 그는 도라이버로 무산언니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니 죽고 싶냐" 무산언니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작은 눈의 사내는 도라이버를 쥔 손을 다시 쳐들었다. 무산언니는 반사적으로 놀라 머리를 쳐들었는데 그의 눈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겁에 질린 눈길이 작은 눈의 사내가 당장 찌를듯이 쳐든 도라이버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그날 밤, 무산언니도 인신매매범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 놈들이 무산언니를 강간한 이유는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하게 기를 죽여놓으려는 것이었디. 그 놈들이 북한여자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포악함을 보여줘 여자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 놈들은 북한여자들이 제발로 중국공안에 찾아가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탈북자들이 중국공안에 잡혀 북송되면 감옥에 가야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놈들은 잔인했다. 잔인해도 후과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저녁, 우리는 인신매매범들이 준비한 승합차를 타고 흑룡강성으로 떠났다. 무산언니까지 다섯명 이었다. 세명의 인신매매범들이 우리를 "호송"했다. 떠나기 전, 작은 눈의 사내는 자기의 바지가랭이 속에 칼을 숨기는 것을 보고 놀라는 우리에게 히죽이 웃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근심 말아. 너희들이 도망치지 않으면 절대 찌르지 않는다"

 

*** 나는 후에 중국공안에 체포되었을 때 연길시에서 겪은 사실을 모두 말했다. 나의 말을 들은 중국경찰들은 연길시 교외의 외딴집을 수색했는데 그때 그집은 비어 있었다.***

         

                       [계 속]   

        

                              탈북자 신영희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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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익후 2014.04.26 08:25
    이 사진 상당히 유명한 사진입니다. 이거 중국 대학생들이 사형제도에 대한 퍼포먼스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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