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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의 그림

 

 

나는 고향을 떠난지 10년이 된다.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온성군의 자그마한 탄광마을이었다.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거뭇거뭇한 석탄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두만강 유역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그 곳에는 모든 것이 거무틱틱했다. 특히 탄광 굴 입구가 빤히 보이는 길옆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지붕 위와 울타리, 벽까지 거뭇거뭇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 곳은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고향이다. 어린 시절 내가 탄광의 굴 입구에서 애들과 놀다가 새까만 탄 먼지를 뒤집어쓰고 들어오면 “이놈의 탄광”을 푸념하며 커다란 대야에 나를 앉혀놓고 씻어주던 어머니가 그 곳에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여자치고는 체구가 꽤 큰 편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체구는 꽤 큰 편이었지만 음식은 항상 조금씩 먹군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에게 차례로 밥을 떠주고 나머지가 있으면 조금 먹고 없으면 식구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마저 먹군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항상 제일 늦게까지 밥상에 앉아있군 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지만 지금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눈물이 난다.

 

나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머리를 수굿하고 땅만 보며 걸었다. 아버지는 휴식 날을 내놓고는 매일 탄광에서 탄을 캤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밤에는 코를 골며 자군 했다. 아버지가 즐겁게 웃으며 말을 할 때는 저녁시간뿐 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던 1992년까지 탄광에서는 굴속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간식으로 빵을 하나씩 주군 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가지고 와서 나와 동생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유일한 낙인 것 같았다.

 

일할 때 땀을 씻는 더러운 수건에 빵을 싸들고 와서는 그것을 나와 동생에게 주고 저녁 밥상에 마주앉아 술을 한 잔 마시며 흐뭇이 웃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내가 열 살이 되던 1995년 까지 이다. 그 후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은 것을 어떻게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대 아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은 1995년부터 식량배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보름씩 혹은 열흘 씩 주군 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96년부터 식량배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는데 그 후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탄광마을에서도 처음에는 열흘 혹은 한 주일에 한두 명씩 늙은이들과 아이들이 죽어나가더니 미구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일 몇 사람씩 죽어나갔다. 그때 나의 어머니도 굶어죽었다. 그때가 1996년 여름이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 2년 동안 풀을 뜯으러 다녔다. 봄에는 칡뿌리를 캐고 여름에는 풀을 뜯었다. 그때 우리네식구는 평균 강냉이 10kg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았다. 어머니는 풀을 뜯어서 그것을 가마에 데치고 거기에 강냉이 쌀이나 밀가루를 조금씩 넣어 풀 밥을 만들어서 식구들에게 먹이군 했다. 어머니는 뼈만 남은 몸을 끌고 매일 산으로 다녔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제 먼저 쓰러졌다. 쓰러진 후에도 나와 동생을 걱정하다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 아버지는 울지도 못했다. 죽은 사람보다 산사람 걱정이 앞서던 때였다. 그래도 사람이 죽었다고 장사를 치르었는데 그것이 더 비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의 집에 3일 동안 문상을 받고 술대접을 해야 하는, 장사를 치를 여력이 있겠는가. 어머니는 친척들의 문상도 받아보지 못하고 죽은 날 서둘러 뒷산에 묻혔다. 그날 나와 동생은 몇 달 만에 쌀밥을 먹어보았다. 어머니를 산에 묻은 뒤 제상에 놓았던 밥 한 그릇이 나와 동생에게 차례졌는데 그때 그 밥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는 기억은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어머니가 죽은 후 우리 식구는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청진으로 떠났다. 떠나는 날 아버지는 어머니가 뜯어놓았던 풀 한 배낭을 길옆에 버리며 처음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동안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다가 비척비척 일어나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후 나와 동생은 청진의 큰아버지 집에서 1년을 살았다. 물론 큰어머니 눈치를 봐가며 하루하루를 주눅 속에 살아야 했지만 그 세월에는 그 눈칫밥도 고마운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노동당 산하 외화벌이 기관에서 트럭기사로 일하고 있은 까닭에 식량배급을 꼭꼭 받고 있었다. 거기에 외화벌이 기관의 물류를 실어 나르며 훔치거나 농간질을 하는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강냉이 밥이라도 그럭저럭 먹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남매를 큰아버지의 집에 맡겨놓고 떠돌이를 했다. 항구나 기차역에서 등짐을 나르기도 하고 가을이면 농장 밭에서 도적질을 하지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양식이 마련되면 그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큰아버지의 집에 가져다 놓고 다시 떠나군 했다. 어떤 때는 도적질을 하다가 죽도록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보안서(경찰서)에 며칠씩 구류되기도 했다.

큰아버지의 집에서 살던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생활 전선에 부대껴야 했다. 하루는 큰 어머니가 “너도 이젠 밥벌이를 해야 한다”면서 나와 동생을 한 장사꾼 여인에게 나를 데려갔다. 큰어머니는 부담스러운 조카인 나와 동생을 그런 방법으로 내쫓았다. 그 후 나와 동생은 그 장사꾼 여인의 집에 얹혀살았다. 장사꾼 여인이 시키는 대로 시장과 기차역에서 담배를 팔기도 하고 옷자락에 술병을 감추고 나가 몰래 팔기도 했다.

 

그 길거리 장사의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나와 동생의 숙식을 위해 그 여인이 시키는 대로 매일 길거리에 나가 담배와 술을 팔았다. 종일 번 돈은 저녁마다 주인여인에게 바쳐야 했다. 나는 그렇게 5년을 살았다. 5년 후, 내가 열일곱 살이 되던 2001년 가을에 고향인 탄광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주인여인은 내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하자 5년 동안 공짜로 부려먹은 것이 조금 미안한 듯 강냉이 두 배낭을 주었다.

 

그때, 어머니가 굶어서 돌아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마을로 돌아가는 나의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제집에서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집 없는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거지)로 살기 싫었다. 어렵게 살아도 제집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고향에 돌아가도 장사를 열심히 하고 집에서 멀지않은 뒷산 골짜기에 화전이라도 일구면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동생을 데리고 고향인 탄광마을로 돌아오니 우리가 살던 집은 그냥 비어 있었다. 물론 울타리와 집의 문짝가지 모두 뜯어간 폐가였다. 나와 동생은 가마니를 길게 찢어 문에 드리워 놓고 며칠을 보냈다. 며칠 후에는 아버지도 돌아왔다. 떠돌아다니던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집에 들렸다가 나와 동생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뒤따라 온 것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떠돌이를 하면서 아버지는 너무나도 변해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뜨면 도적질을 할 생각, 꿈을 꿔도 도적질을 하는 꿈만 꾸는 전형적인 도적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최악의 굶주림이나 견디기 어려운 고생 속에 허우적이다 보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깨우쳤다. 무서운 굶주림과 오랜 세월의 고생은 너무 어질어 남에게 싫은 말 한 마디 못하던 아버지를 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줄기차게 도적질을 했다. 첫날에는 동네를 돌아치다가 강냉이 반 자루를 훔쳐오고 다음 날에는 산 너머 이웃부락에 가서 염소를 한 마리 훔쳐왔다. 셋째 날에는 이웃동네의 빨래 줄에 걸린 옷을 훔치다가 붙들려 죽도록 맞았다. 아버지는 도적질을 하고도 창피한 줄 몰랐다. 도적질한 물건들을 팔아 그것으로 술을 사서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아버지와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차츰 아버지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없이 살았기에 어머니도 굶어서 돌아갔다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너무도 책임감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내가 힘겹게 장사를 해서 벌어온 식량을 훔쳐 그것으로 술을 바꿔먹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간 어느 날, 저녁밥을 먹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중국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중국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많더구나”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깊어가면서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던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버지는 또 중국 이야기를 했다.

“너 중국에 한 번 갔다 오지 않겠니?”

“중국엔 왜요?” 그때도 나는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중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어 온다고 그러더구나. 상남이 색시는 3년 전에 중국으로 갔다가 어제 왔는데 돈을 많이 가져왔다고 그러더라. 그 돈이면 2년간 먹을 식량을 살수 있다더라. 밤중에 왔다가 밤중에 다시 중국으로 갔대.”

상남이 색시란 우리 옆집에서 살던 여인이었다. 그는 후에 인신매매범죄로 보위부(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나는 그 후 며칠 동안 고심했다. 아버지의 말아 아니더라도 중국에 가면 돈을 좀 벌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소한 중국 땅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집에서 그냥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기도 싫었다. 차츰 나에게 어떤 유혹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에 가서 1년만 돈을 벌어가지고 왔으면. 강냉이 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만치 돈을 벌어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마침내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 굳히고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

 

“아버지 나도 중국에 갔다 오겠어요”

나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기뻐했다.

“잘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중국에 가는 한 여자한데 말을 해뒀다. 너를 데려다 달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는 날 집에 없었다. 어데 갔는지도 몰랐다. 어스름이 깃드는 저녁 무렵 한 여인이 찾아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떠나면서 장사를 하느라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동생에게 주었다. 내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제일 걱정한 것은 동생이었다. 나의 동생은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가늘었다. 그래서 걸을 때면 다리를 절군 했는데 몸도 부실한 동생이 부실한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되었다.

 

나는 울먹이는 동생에게 1년만 살아있어 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그때가 2002년 5월이었다. 나는 밤 11시에 두만강을 건넜다. 나를 데리고 떠난 여인은 자기가 여러 차례 중국을 넘나들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국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곳에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초소가 있고 어느 곳으로 두만강을 건너가면 잡히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그날은 10시부터 재미있는 연속극(드라마)를 방영하기에 군인들은 근무 장소를 이탈해 TV를 보고 있다는 것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우리가 가슴까지 차오르는 두만강을 허우적거리며 건너가니 중국 쪽 강기슭에서는 한 중국 조선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갈아입을 옷을 주며 우선우선한 어조로 말했다. “오느라고 수고했소.” 그는 찦차를 강기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숨겨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찦차를 타고 두 시간 가량 달려 길림성 화룡시 외곽의 한 농촌마을에 도착했다. 도중에 중국변방대의 검문소를 에도느라 산속 길을 한 시간정도 달렸을 뿐이었다.

 

나는 화룡시 부근의 농촌마을에 도착한 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말과 달리 국경을 넘는 일이 참 쉽다는 생각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선족 주인에게 식당이나 농촌에 일자리를 하나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허나 조선족 주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나는 경악했다. 조선족 주인은 나의 부탁을 듣더니 대뜸 화를 냈다.

“야 나는 너를 데려오는 대가로 네 아버지에게 중국 돈 3천원을 줬다. 돈 3천원이 작은 줄 알아? 중국에서도 농민이 3천원을 벌려면 1년 동안 일해야 한다. 가겠으면 그 돈을 갚아야 한다.”

나는 같이 온 여인에게 주인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여인은 조금 미안한 듯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해줬다.

“맞다. 사실은 네 아버지가 부탁을 해서 이렇게 됐다”  나는 여인에게 세 번씩이나 그 말이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그 다음은 절망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울분이 치솟았다. 더러운 인간, 딸을 팔아먹다니.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계속]

                             탈북자 신영희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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