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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레드 기획] ‘친척’ 생애주기별 잔소리와 ‘시월드’의 ‘애 드립’을 피해 찾아가는 도피처 열전공부 잘하냐, 취업 안 하냐, 애인 있냐, 결혼 언제 하냐, 애 낳을 거냐, 살이 쪘네 빠졌네…. 친척들은 생애주기별로 잔소리하도록 프로그래밍되기라도 한 걸까. 추석을 일주일여 앞둔 9월10일, 한 포털 사이트의 핫토픽 키워드에는 ‘추석 때 듣기 싫은 말’이 순위권에 올랐다. 취업 포털 ‘사람인’은 구직자 64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추석 때 듣기 싫은 말 1위로 ‘친척 누구는 대기업에 들어갔던데’가 뽑혔다(25.9%). 결혼정보회사 ‘듀오’도 30대 미혼 남녀 425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답변자의 51.1%가 ‘내년에 결혼하겠니?’를 꼽았다.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가 20~40대 기혼 남녀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는 55.2%의 답변자가 명절 연휴에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시댁·처가 친척들’을 꼽았다. 어느덧 명절이 호환마마보다 두려워졌다는 사람들, 이들에게 주말까지 붙어 긴 연휴가 된 올해 추석은 피하고 싶은 시간일 뿐이다. 달력에 연달아 새겨진 붉은 숫자를 봐도 심드렁하기만 한 이들에게 ‘추석 대피소’를 물었다. 이들이 물색해둔 장소를 참고 삼아 대피하라, 추석이다. 

‘왜 친척집에 가기 싫나’ 지난해 주제 그대로

황금연휴를 앞둔 4일 오후 인천공항 항공사 출국 수속대에서 여행객들이 길게 줄을 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인천공항/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올해부터 나 친척집 안 간다.” 출판편집자 진원지씨는 서른 살을 기점으로 명절 친척집 방문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명절을 앞둔 싱글들의 각오는 비장하다. 황금 연휴를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돼 보내기엔 청춘은 푸르고 아깝기만 하다. 진씨는 곧 폐쇄된다는 동해남부선을 찾아 기차를 타고 가볼까, 미국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잔뜩 모아 볼까, 공상과학(SF) 도서관 같은 특이한 장소에 찾아가볼까 고민 중이다. 계획은 찬란하지만 단칼에 거절한 부모님의 반응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올해도 결국 하루는 친척들에게 시달릴 처지다. “연휴 첫날에만 친척집에 머물기로 합의를 봤다. 적당히 피해 있더라도 아마 식사 시간에는 스트레스를 좀 받아야겠지.” 진씨는 올 추석을 기점으로 도피처를 하나씩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진짜 대피소로 대피하는 이도 있다. 직장인 ㄱ(38)씨는 추석 연휴에 지리산 대피소를 예약했다. “그곳의 이름은 명실상부 대피소다. 비누를 쓸 수도 없고 치약으로 이를 닦을 수도 없는 그곳에 놀랍게도 추석에 딱 맞물려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추석 전날 밤 대피소를 예약하기 위해 ㄱ씨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 지리산 대피소 예약은 보름 전 아침 10시에 열리는데, 5분 만에 예약이 마감됐다. 예약 전쟁에 동참한 동료는 “인기 강좌 수강 신청보다 더 떨린다”고 했단다. ㄱ씨는 사실 친지들의 공격보다 귀성 전쟁이 더 무섭다. 과거 귀성길에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못하겠다 마음먹은 뒤로 추석 때 고향집에 가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런데 대피소 가느라 꼼짝없이 귀성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ㄱ씨는 연휴 하루 전인 9월17일 밤 버스를 타고 떠나 연휴 마지막 날인 9월20일 하산한다. “동행 4명 중에는 가족을 버린 50대 여성분도 있다. ‘깁스한 시어머니를 두고 간다’더라. 올해부터 차례를 안 지내기로 했는데 집에 있으면 어영부영 일이 생길 것 같아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추석에는 세뱃돈도 못 받는데, 굳이 가서 감정노동에 준하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요?” 월간 <잉여> 편집장 최서윤(27)씨도 추석이 반갑지 않다. 지난해 추석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잉여’들을 모아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 주제는 행복한 잉여가 되는 법, 청년 복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지만 실은 ‘우리는 추석에 왜 친척집에 가기 싫은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월간 <잉여>는 청년들이 가진 명절 스트레스의 근원이 친지들의 질문 공세를 넘어 취업과 결혼이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 현실에 있다고 짚었다.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도 어려워진 시대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모였다. 그래서 결론이 났느냐고? 지난해의 주제를 그대로 끌어와 올해 이어가도 될 만큼 청년들이 놓인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올해도 토론회를 여느냐는 질문에 잉여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 귀찮다. 친구들을 만나 영화 보고 수다 떨고 할 것 같다.” 영화관과 카페가 청년들을 구원할지니. 

멀고도 가까운 곳에 ‘추석 대피소’는 많다. 위부터 명절에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 연휴에도 불 밝힌 카페에 깃든 사람들.한겨레 박미향

명절 쇠러 가는 친구 집을 노려라

시나리오작가 한아무개(31)씨는 작업실 삼은 단골 카페가 추석 당일을 빼고 문 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가족끼리 모이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라 적당한 핑곗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마감이 코앞이라고 말할 생각.” 한씨는 명절 당일에 쉬는 곳이 많아 찾아갈 곳이 마땅치 않은 이들을 위해 또 다른 도피처를 제안하기도 했다. “카페도 쉬고 북적이는 시내의 영화관도 싫다면, 명절을 쇠러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친구의 집을 물색하라.” 

명절을 피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추석 대피소를 직접 차리는 사람도 있다. 직장인 김회민(30)씨는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게시판에 추석 연휴 보드게임 모임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다. “큰 방 하나 잡아놓고 밥때 되면 치킨·피자 등 배달시켜 먹고, 대화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놀다가 살짝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서 만화책을 보며 뒹굴뒹굴하는 로망”을 함께 실현할 자들을 구했다. 김씨 본인은 정작 아직까지 추석 스트레스는 없다. 하지만 집안의 장손인지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없고 긴 연휴를 그냥 흘러보내기는 아까워 “잉여 연휴, 잉여 집단을 몰아놓고” 놀 수 있는 모임을 꾸렸다. 게임은 1인용부터, 2~4인용 3가지, 8인용까지 가능한 것 3가지 등 종류별로 구비해두고 대기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모임에 지원한 인원은 본인을 포함해 2명, 대피자들을 당분간 더 기다려볼 참이다. 

걱정과 애정으로 포장된 친척들의 잔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현실보다는 허구의 세계가 차라리 위안이 될까. 명절 연휴에 영화관이 북적이는 이유일지 모른다.한겨레 박종식

직장인 ㅈ(30)씨는 최근에 독립했다. “지난해부터 자유인이 돼” 친척들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다. 올해는 집도 떠났으니 명절에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피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독립한 집이 가장 안전한 대피소다. 하지만 얼마 전 먼저 결혼한 동생네 부부가 어머니집에 인사를 올 것 같아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나도 가야 하나요?”

어머니는 인질? 구원받은 사람? 

취업하고 결혼했다고 친척들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기는 아직 멀었다.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이 그칠 때쯤이면 “애는 언제 낳냐”로 출발해 “둘을 낳아라, 셋을 낳아라”로 이어지는 친척들의 ‘애 드립’이 시작된다. 그런 순간, 카페는 청년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부녀도 구한다. ㅎ(33)씨의 도피처는 카페다. 스스로 ‘커피 의존형 인간’임을 밝힌 그는 소모된 에너지를 카페인으로 충전해가며 명절을 난다. 


결혼 3년차, 그간 무자식 상팔자라 여겨온 ㅅ(31)씨는 결혼 뒤 다섯 차례의 명절을 지나오면서 내공이 좀 생겼다 싶지만 여전히 올해도 설거지를 하다 그릇을 던지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까 두렵다. ㅅ씨는 왠지 자신이 “헐크로 변신할 것 같은 때”가 오면 시댁 빈방으로 숨어든다. “어디 가서 바람이라도 쐬면 좋겠지만 들락거리자면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잖나. 사람들 왁자한 거실을 벗어나 손님들 짐 쌓아둔 빈방에서 한시름을 돌린다.” 올해 결혼한 직장인 이아무개(30)씨는 임신 중이다. “임신을 핑계로 올 추석은 집에서 뒹구는 것이 계획”이다. 엄마는 아이의 안식처, 아이는 엄마의 도피처다. 적어도 명절만큼은. 

그리하여 결혼 뒤 처음 맞는 명절에 결단을 내린 이도 있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씨 부부는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날, 양가 어머니를 모시고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교토로 떠난다. “어머니도 같이 가는데 친척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어머니를 인질 삼아 도피처로 떠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 구출 작전이기도 하다. “아내의 친척들이 왁자하게 모이는 편인데, 몇십 명분 음식을 장모님이 다 하시더라.” 여행 제안에 어머니들이 반색한 이유다. 명절마다 여행을 떠나던 어머니, 명절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야 했던 어머니 두 사람이 사돈으로 엮여 명절에 떠난다. 어떤 여행담이 쓰일까. 

차우진씨의 경우 그렇듯, 호텔과 도처의 여행지는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매혹적인 도피처다. 애정과 걱정으로 포장된 잔소리를 피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명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람들은 집 대신 호텔 방으로 깃든다. 더욱이 국내 숙박업소의 경우 명절 시즌은 비즈니스차 숙박하는 이들이 급감해 매출을 올리기 위해 대대적인 할인 판매를 할 때다. 패키지 가격이 평소보다 최대 50%까지 저렴하다.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내 게스트하우스 ‘지지향’ 홍보·마케팅 담당 조정태 주임은 젊은 부부들의 예약률이 높다고 밝혔다. 조 주임은 “지난 추석 때보다 예약된 객실이 많다. 지금 추세로는 60% 이상 객실이 찰 것 같다. 아마도 명절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숙소를 찾는 듯하다”고 전했다. 지지향은 TV 대신 서가에 책이 빼곡히 꽂힌, 사색과 힐링을 콘셉트로 한 숙소다. 이외에도 시내의 주요 호텔인 신라호텔은 추석 연휴 기간 객실 예약이 지난해보다 23% 늘었다고 밝혔다. 부산 웨스틴조설호텔 객실 예약률 역시 지난해보다 15%포인트 이상 오른 90%를 기록했다. ‘시월드’와 ‘처월드’에서 끓어오르던 심정을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독일 모양이다. 

국내 숙박업소, 대대적 할인 판매

언제부터 명절이 스트레스의 원형이 되었을까. 월간 <잉여>의 멤버들이 말하듯 평범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사회 구조가 명절도 팍팍하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본인도 답이 안 나오는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는 잔소리 경계령이 울리기 일보 직전이다. 대피 공작을 펼치는 이들의 제안을 톺아보면 이렇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 피신할 곳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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