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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일보

2009년 4월 이뤄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의 유럽 순방은 두 가지 면에서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하나는 8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오바마 대통령의 대유럽 정책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로 명성을 떨치는 퍼스트레이디들의 패션 대결이었다. 미국의 새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탁월한 패션 감각 덕에 이미 ‘검은 재클린’이라는 별명을 얻던 중이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프랑스 정계에 등장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부인 카를라 브루니가 뒤지고 싶을 리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패션으로 정치를 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미국의 중저가 브랜드 제이크루의 카디건이나 스커트 등을 입어 당당하고 매력 넘치는 모습을 선보인 미셸에 비해, 브루니는 샤넬과 에르메스 등 전통 있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우아한 자태를 과시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미셸과 이탈리아 재벌 가문 태생인 브루니의 성장환경도 옷 고르는 취향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적어도 언론과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킨 반향이라는 차원에서 이 ‘대결’은 미셸의 승리로 끝난 듯하다. 미셸이 선택한 옷들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 후로도 제이크루나 탤보츠 등 미국 브랜드들은 미셸의 취향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오바마 행정부의 2기 취임식이 열린 지난 2월엔 “미셸이 무슨 옷을 입든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것”이라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당시 미셸은 톰 브라운 코트를 입고 제이크루의 벨트를 착용했다.

패션과 정치=팔다리가 긴 대신 어깨가 넓은 미셸은 폭 굵은 어깨 끈이 있는 드레스를 주로 입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신체를 당당하게 드러내면서도 단점은 교묘히 가리고, 강렬한 색깔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감각은 과연 뛰어나다.

그러나 패션에 대한 미셸의 진면목은 미국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비싸지 않은 옷을 적절히 선택해 패션산업에 의도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데서 더 잘 드러난다. 2009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셸이 ‘1인 경기부양책’의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대선전이 치열하던 지난해 10월, 의류 브랜드 톰 브라운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퍼스트레이디가 우리 봄 신상품을 입고 나와 주셔서 영광”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영국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이 미셸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완판녀’로 등극한 듯하다. 왕세손 부부의 결혼식 직후엔 어깨를 덮는 긴 소매 웨딩드레스가 유행했다. 그때까지 ‘한물갔다’는 평가를 듣던 디자인이었지만 미들턴이 살려낸 것이다. 이후로는 미들턴이 공식석상에 입고 나타났던 의상들이 차례로 매진되기 시작했다. 한화 12만원 정도였던 스페인 브랜드 ‘자라’의 원피스가 미들턴이 입은 직후 온라인에서 3배 가까운 가격에 팔린 적도 있다.

미들턴의 손에 닿으면 모조리 완판(sold out)되는 현상은 비단 옷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임신 기간 입었던 임부복 제조사의 매출을 500% 신장시킨 미들턴의 기록은 출산 뒤 아기용품으로 이어졌다. 언론에 첫 공개된 갓난아기 왕자를 쌌던 속싸개와 카시트가 순식간에 매진됐다.

영국 왕세손 부부의 선택은 서민들의 위화감을 유발하지 않는 선에서 신중히 이뤄지고 있다. 아기 속싸개는 2개들이 세트가 5만원 선, 카시트는 13만원 선이었다. 최근 공개된 왕세손 가족사진 속에서 미들턴이 입어 완판시킨 보라색 원피스도 10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펑리위안, 최초의 아시아 완판녀=올해 부상한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로는 단연 시진핑 중국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가 꼽힌다. 아시아인이 오로지 패션으로 세계에서 이 정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례도 펑이 처음이다.

매년 베스트 드레서를 뽑는 미국 연예잡지 배니티페어는 지난 7월 세계 정치지도자 부인 분야 베스트 드레서로 펑을 선정했다. 지난 3월 러시아 방문 당시 착용했던 검정색 정장과 가방에 높은 평가가 내려졌다. 미셸과 브루니를 모두 제친 중국 퍼스트레이디는 미국에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펑의 패션에도 정치가 있다.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될 당시의 의상은 중국 브랜드 ‘익셉션’의 제품이다. 펑은 이후로도 중국 브랜드를 애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적인 공산당 내부에서는 펑의 화려한 행보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당당하고 매력적인 펑의 모습은 국가 브랜드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펑의 의상이 국산 제품이라는 사실이 공개된 이후 중국인들이 보인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전통적으로 공공 정치의 영역에서 여성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중국에서 펑의 ‘스타일’이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평했다.

완판녀의 조건=대통령 부인이나 왕족이라고 다 ‘완판녀’나 ‘패셔니스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건 아니다. 미 패션 전문지 ‘패셔니스타’는 지난해 공화당 대선후보 밋 롬니의 아내 앤의 패션을 분석하며 패셔니스타 정치인 아내의 조건을 이렇게 적었다. ‘예쁘고, 금발머리에, 패션에 대한 열정을 갖추고 있다.’

완판녀의 기본 덕목은 역시 뛰어난 패션감각이다. 제대로 입을 줄 알아야 무슨 옷을 걸치든 아름다움과 품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초로 패션을 능수능란하게 활용, 아름답고 당당한 퍼스트레이디 상(像)을 구축했던 재클린 케네디의 옷차림은 현재까지도 의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미모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다. 오늘의 미들턴이나 옛날의 다이애나비(妃), 더 옛날의 재클린이 그랬던 것처럼.

이 밖에도 완판녀로 꼽히는 이들은 활발하고 당당한 성격을 겸비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펑이 아무리 옷을 잘 입었더라도, 전 세계 사진기자 앞에서 망설임 없이 남편의 팔짱을 끼지 못했다면 그리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덧붙여 여담 하나. 이 조건에 따르면 지난해 앤 롬니는 ‘완판녀’가 되었어야 마땅한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패셔니스타와 폭스뉴스는 앤을 불운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 정치적 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패션업계 자체가 진보 성향이라 공화당 후보의 아내인 앤을 좋아하지 않았다. 둘째, 앤이 입은 브랜드의 제품을 완판녀 미셸이 피하는 바람에 패션업계가 앤을 꺼리게 됐다. 셋째, 미셸과 친한 패션업계 대모가 노골적으로 미셸만 후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연예인을 제외하곤 모든 세대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패셔니스타가 전무한 상태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든 가방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김 여사의 패션보다는 가방 가격에 관심이 더 쏠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옷차림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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