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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규모 철광석 생산 기지인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쪽 방향으로 백리쯤 가면 중국 연변지역에서 꽤 알려진 경흥탄광이 있다. 중국어로는 칭씽 메이쾅이라고 말한다. 중국 길림성 화령시에서 남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산속인 그곳에는 크고작은 4개의 탄광이 골짜기와 산등성이들에 자리잡고 있다.

 

연변의 다른 많은 지역의 산판과 농촌부락들처럼 그 곳에도 한때 적지않은 탈북자들이 숨어있었다. 탈북자들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후 공안들의 살벌한 감시와 단속을 피해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산판의 목재소와 인삼밭, 외진 농촌부락들과 탄광들에 숨어들어 근근이 살아갔다.

 

나도 탈북한 후 그 곳에서 얼마간 숨어지냈다. 처음 탈북한 후 중국 화룡시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 있었는데, 친척이 공안들의 감시와 단속이 심해지자 나를 외진 탄광으로 보내준 것이었다. 탄광 주인은 친척의 대학 동창이라고 했다. 내가 산속에 자리잡은 탄광에 갔을때 그곳에는 여러명의 북한사람들이 있었다. 모두가 북한을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아내와 함께 탈북했다가 중국의 인신매매범들에게 아내를 납치당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탄광 근처의 산속에 반토굴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여덟살과 열살, 열 한살의 세 아이였다. 굶주림에 부모들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랑하다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온 아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봄여름에는 산나물과 버섯을 뜯어 팔고 가을에는 기름개구리를 잡아 팔며 산 속에서 말 그대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근의 농촌부락에 그애들을 도와주는 노인이 한 분 계시는 것이었다. 나이 70이 지난 노인은 한 주일에 한 번씩, 혹은 열흘에 한 번씩 쌀과 부식물을 아이들에게 가져다 줬다. 고마운 분이었다.

 

아이들의 말이 노인의 자식들은 모두 큰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를 3년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노인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아이들을 극진히 도와주는 노인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어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왜 아이들을 도와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자기가 중공군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사람이라고 대답해줬다. 노인은 몇 십년 전 자기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북한에서 온 아이들이라는 이유를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기드문 인연이었다. 아마 나이가 들어 단순해진 노인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인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노인은 어수룩 하다고 말할만치 단순하면서도 극성스러운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노인을 보면서 70이 지난 나이에 산길을 오르내리는 건강한 모습이 단순하면서도 극성그러운 성격과 버릇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이들도 노인을 잘 따랐다. 제딴에는 성의를 보인다고 건강에 좋다는 약재나 산나물을 채취해서 노인에게 주군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의 친척이 한국인 목사를 한 분 데리고 나타났다. 친척은 한국인 목사님이 유명한 인권운동가인데 탈북자들을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나에게 소개했다.

 

나는 한국인 목사님을 아이들의 움막이 있는 숲속으로 모셔갔다. 한국인 목사님은 자못 가슴이 아프다는 듯 어두운 낯 색을 숨기지 않고 아이들이 살고 있는 움막과 그 주변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아가지고 돌아갔다. 돌아가며 며칠 후에 다시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을 꼭 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국인 목사는 며칠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그 날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이없는 광경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이 기름개구리를 잡아 판돈으로 돼지고기와 해산물을 비롯한 먹 거리를 가득 사들인 것이었다.

 

아이들이 기름개구리를 잡거나 산나물과 버섯을 뜯으면 중국노인이 그것을 시장에 가져다 팔아주고 음식을 사주군 했는데 그 날 고마운 중국노인이 자기의 돈까지 보태서 아이들에게 먹 거리를 한 짐 사가지고 온 것이었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한국인 목사가 나타나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사람 또 왔어”라고 자기들 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기름진 음식을 이미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한국인 목사가 사가지고 온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사실이 한국인 목사를 그토록 실망시킬 줄이야.

 

한국인 목사는 자기가 사들고 온 음식보따리를 움막구석에 털썩 던져 놓는 아이들을 본 후에 낯 색이 불쾌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움막주변을 한번 더 비디오카메라에 담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고 녀석들 참 맹랑하군”

 

나는 한국인 목사가 돌아간 후에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왜 한국인목사가 기분이 언짢아 돌아갔는지.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라면 철이 없어서 목사의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철이 너무 없었던 까닭에 아이들은 인권운동가라는 한국인 목사님의 배척을 받았다. 그 애들은 몇 개월 후 순찰중이던 중국공안에 잡혀 북송되었다.

 

아이들이 중국공안에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움막에 가보았을 때 그 앞에는 중국인 노인만이 혼자 앉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길로 멀거니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침통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그때 그 한국목사가 아이들을 좀 도와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건데" 내가 그 한국인 목사가 질이나쁜 위선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달 후였다. 나를 찾아온 친척의 말을 듣고.

 

친척은 화가나서 한국인 목사를 욕했다. "그 한국인 목사는 나쁜 사람이다. 돌아다니며 좋은 말을 하고, 어려운 탈북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진만 잔뜩 찍고, 갈때에는 잘생긴 처녀애를 한 명 한국에 보내준다면서 데리고 갔는데 그리구선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명색이 인권운동가라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그 때부터 나는 인권운동에도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인권운동이란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것, 일부 파렴치한 인간들이 인권운동을 빙자해 제 잇속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지금도 일부 파렴치한 인간들이 인권 운동가의 탈을 쓰고 제 잇속을 채우거나 위선을 떨며 돌아치는 것을 볼때마다 중국인 노인을 생각해보군 한다. 어리석다고 말할 만치 단순했던 그 노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은, 그 노인에게는 사심이 없었고 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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