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산업의 장래 예견, 기존회사 구입 철도왕 군림
역사를 만드는 세계 100대 부호들 (10) -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Cornelius Vanderbilt) (하) |
밴더빌트는 매사에 치밀했고 그의 사업분석 능력은 탁월했다. 생활은 검소하고, 고객만족도를 중요시했다. 중요 사업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문가나 경영능력이 있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선박회사 함장(Commodore Vanderbilt)’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1860년대에 강이나 호수를 통한 해운사업보다 속도 빠른 철도운송의 미래를 직감하고 철도 운송에 뛰어들었다. 그는 철도선을 신설하는 것보다 기존철도 회사를 구입하는 사업전략을 채택해 롱아일랜드, 뉴욕, 할렘과 허드슨 강변 철도선을 매입했다. 1867년에는 센트럴 철도선을 병합했다. 그는 철도사업에 크게 투자, 서비스를 향상시키고 저가정책의 사업전략으로 경쟁자들을 흡수하던지 파산시켜 뉴욕 센트럴 철도선 (NYC)을 탄생시켰다. 그는 세계 최대의 그랜드 센트럴역을 건설하고 5년 안에 2,5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는 철도사업에 관심을 둔 장남 윌리엄과 함께 미 중서부와 남부 철도선을 장악해 세계 최대의 철도 회사로 군림했다. 이로 인해 뉴욕 센추럴 철도선은 뉴욕과 펜실바니아, 미쉬간, 캐나다 남부, 일리노이, 오하이오, 인디애너, 미조리주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1868년 밴더빌트의 부인 소피아가 세상을 떠났다. 소피아는 남편보다 한 살 아래로 이종사촌지간이었다. 소피아는 55년간 동거동락 하며 사업성장에 커다란 힘이었다. 따라서 부인의 죽음은 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1년후 73세의 밴더빌트는 먼 친척되는 34세의 프란세스 크로포드와 재혼했다. 새부인은 그의 열 두 자녀들 중 일곱째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새 부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영역을 보여줬고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남편을 설득해 1백만 달러 (현재가치 16억달러)를 그가 알지도 못하는 내쉬빌대학교(Nashiville Central University)에 기증했다. 이것은 남북전쟁 이후 남북인들간의 반감과 전후 상처를 줄이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 테네씨주 내쉬빌에 있는 이 대학교는 1872년 설립됐으나 자금이 모자라 설립자인 맥타이어는 사촌 동서인 뉴욕의 밴더빌트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지원에 감사, 밴더빌트가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이름을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로 바꿨다. 현재 이 대학교는 단과대학 4개와 대학원을 6개 운영하고 1만2천명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작년도에는 세계 통산 명문대학 순위 19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밴더빌트는 장남 윌리엄에게 경영권을 넘긴 후 1877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존한 9명의 자녀들에게 50만 달러씩 분배하고 나머지 9, 500만 달러의 재산은 장남에게 넘겼다.
당시 미국 최대의 거부이며 철도왕이었으나 밴더빌트는 내쉬빌대학교에 100만 달러를 기증한 것과 자기 교회에 5만 달러 기부금을 낸 것 외에는 이렇다할 자선사업은 하지 않았다.
1650년 홀랜드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이주해온 5대 선조의 자손인 그는 산업혁명 이후 미국에서 최대의 부를 축적한 사업가로는 제1 번이었다. (다음은 앤드루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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