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홍콩경제 풍운아’
90년대 틈새 투자은행 페레그린 고속성장 주역
아시아 외환위기로 몰락, 현재 한국서 재기 노려
1998년 1월12일 필자는 한국의 외환위기로 외자유치를 위해 홍콩로드쇼에 와있었다. 그날 아침 호텔식당에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지를 펴들었다. 전면에 헤드라인은 온통 홍콩페레그린증권의 파산소식과 그 배후인물로 안드레 리(현재 48세)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안드레 리는 세계금융사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로 정말 전설적 스토리를 만든 사람이다. 바로 1995년에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영국의 베어링은행을 순식간에 파산시킨 파생상품 트레이더 닉 리슨과 페레그린의 안드레 리를 사람들은 아주 비슷한 사람이며 두 사건을 대비해 얘기하곤 한다. 서양의 정크본드의 대명사가 미국 드렉셀버냄램버트의 마이클 밀켄이라면 동양에는 페레그린증권의 안드레 리가 있다.
페레그린증권은 영국의 자동차레이서 출신인 필립토스 회장과 그의 홍콩파트너인 프란시스 릉에 의해 1988년 설립되었다. 세계적 다국적 투자은행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한 명성과 네트웍을 극복하기 위해 페레그린은 소위 잘 나가는 은행이 건드리지 않는 부문에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영업하는 ‘부띠끄’ 투자은행을 지향하였다. 그러한 페레그린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 안드레 리다. 그는 토스회장과 담판 지어 소위 정크본드 발행부서를 창설한다. 몇 년 후 페레그린의 채권부는 회사 전체 이익의 반을 차지하게 되고 안드레는 페레그린을 일약 스타투자은행으로 만들어놓았다.
안드레는 매우 특이한 경력과 출신을 가지고 있다. 미국 에모리대학 교수인 한국인 아버지와 캐나다의 불란서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청소년 때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였다. 안드레의 할아버지는 광복 후 외교관 1세대로 프랑스 공사를 지낸 이능섭씨이며 윤보선 전 대통령의 누이동생이 바로 할머니다. 그의 한국이름은 이석진이며 1963년 미국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이후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콜게이트대학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나중에 리먼브라더스에 입사, 홍콩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페레그린으로 옮기게 된다. 그는 페레그린에서 채권부를 맡아 완전히 새로운 영업전략을 짜게 되는데 이는 바로 골드만삭스, 제이피모건 등 특급 투자은행들이 꺼리는 고객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아시아는 빠른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는 중이었지만 채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안드레는 주로 동남아, 중국, 한국 등에서 채권발행을 맡았고 그가 주선한 채권은 워낙 수익률이 높고 또 실제로 디폴트율도 낮아 매우 인기가 높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소위 종금사로 불리는 종합금융사의 설립이 유행이었고 종금사가 돈을 불리는 좋은 대상은 바로 고수익채권이었다. 자연스레 안드레가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발행하는 고수익채권은 한국에 가져오자마자 바로 공항에서 종금사들에게 팔려나갔다. 나중에 아시아 외환위기로 채권이 디폴트 되자 이는 바로 한국 종금사들의 퇴출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당시 수많은 종금사들이 퇴출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페레그린의 고수익채권들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안드레가 페레그린의 채권부를 맡은 후 불과 14명에 불과하던 채권팀은 220명까지 늘어났다. 당시 홍콩에서는 적어도 페레그린이 유수한 투자은행들을 제치고 가장 잘 나가는 투자은행이 된 것이다. 창업자 토스회장의 절대적 신임 속에 안드레는 승승장구하였고 세계적인 투자은행의 꿈을 키워갔다. 안드레의 외모는 서양인이나 한국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유년시절 윤보선 대통령 자택에서 키워졌고 한국에서 청년시절까지 학교를 다녔으며 하버드, 예일 같은 명문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러한 배경으로 안드레는 서양보다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그리고 명문대 출신보다는 헝그리 정신을 가진 증권맨을 선호하였다.
그는 매우 다혈질이고 적극적이며 위험을 감수하는 스타일로 페레그린 채권부를 무서운 속도로 키워갔다. 골드만삭스 등 세계최대 투자은행 직원들도 적어도 홍콩에서는 페레그린 앞에 맥을 쓰지 못했다. 그는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파워를 높이기를 진정으로 원했던 ‘애국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페레그린은 한국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집안인 신동방과 합작으로 동방페레그린증권을 설립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물의를 일으켰던 중앙종금의 김석기씨가 관련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신동방은 당시 잘 나가던 백화점인 미도파를 대상으로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한다. 안드레의 저돌적이며 특이한 스타일은 페레그린 그룹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합작사 동방페레그린의 기업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안드레는 아침 7시에 전략회의를 하는데 7시 정각에 바로 컨퍼런스룸의 문을 잠궈버렸다. 늦는 사람은 바로 해고대상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택시회사인 스테디세이프 사의 2억6,500만 달러 채권을 외환위기로 인해 팔지 못하고 페레그린이 자체자금으로 인수하는 바람에 아시아 외환위기로 인한 인도네시아 루피화의 폭락으로 페레그린은 몰락하게 된다.
페레그린(Peregrine)은 ‘송골매’라는 뜻인데 페레그린증권의 몰락을 서구신문에서는 ‘Soared like a falcon, Sank like a reckless’라고 표현하였다. 페레그린 파산 후 안드레는 한국으로 돌아오며 현재 재기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