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94fa65a7f347571146e03c48903559f8.jpg

ffbfa1d2c99d5ba3f4a63e615c3c10c1.jpg

 

나는 북한에서 살 때 비교적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어리숙하다는 뜻이다.

북한정권은 주민들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고지식은 미덕이라는 교육을 많이 했다.

"장군님(김정일)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아야"


이 말을 나는 당 회의 때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북한의 영화나 선전물에도 "고지식은 당원의 미덕"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는 순수하고 고지식한 당원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충성하는 것이 당원의 본분,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갈수 있는 곳이 북한사회였다.

나 역시 무난하게 살려면 정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나는 가족을 잃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시키면 시키는대로 사는데 습관되어 있었다.

집을 떠나 산판의 벌목장과 발전소 건설장, 국가에서 진행하는 대상건설장을 비롯한 열악하고 힘겨운 곳에 수없이 동원되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기 싫어 구실을 대고 발뺌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나는 바보였다.

나는 아내가 죽었을때에도 집에 없었다. 평양-남포고속도 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있었다.

아내는 굶어죽었다.  혼자 세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하다가...

 

아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의 시신앞에서 울지도 못했다.

나는 그때 북한정권이 주민들에게 늘쌍 설교하는 충성과 고지식함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억울하게 저세상으로 간 아내에게 너무 죄스러웠다. 

 

아내가 죽은 후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아내는 열두살과 아홉살, 일곱살이 된 세 자식들을 남겨놓고 죽었다.

일곱살인 막내는 딸애였다.

 

그때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던 1996년이었다.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전에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세끼를 굶기지 않고 먹이기 위해 못해본 일, 못해본 짓이 없었다.

봄에는 산골짜기의 부대기 농사를 했고 여름에는 강가에서 사금채취를 했다.

겨울에는 장사를 다녔다.

가을에는 농장 밭에 들어가 도적질도 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않고 일했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한 번도 배불리 밥을 먹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최악의 굶주림을 견디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굶어죽기가 정승하기보다 힘들다"는 속담의 뜻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굶주림을 참고견디라는 말이 야만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못해 날이 갈수록 허약해 질때면 식욕은 참기 어렵게 왕성해진다.

특히 아이들이 그 강렬해진 식욕을 억제하며 굶주린다는 것은 참기어려운 고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업다 . 

정승도 3일을 굶으면 도적질을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 같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가면 항상 저녁 늦게야 돌아오군 했다.

옥수수나 기타 먹거리를 구하러 부근 농촌에 장사를 갈때면 이틀씩, 사흘씩 집에 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어린 세 자식들은 어른 없는 집에서 무서운 밤을 보냈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갈때면 항상 어린 세 자식들의 점심밥을 따로따로 공기에 담아 두군 했다.
멀리 갈때에는 저녁밥까지 공기에 담아 찬장안에 놔두군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접심이나 저녁때를 기다려 자기 밥 그릇을 꺼내먹군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은 나중에 밥시간을 맞춰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있으면 보는 족족 먹어치우군 했다.
점십밥을 그릇에 담아 찬장안에 넣어두면 아버지가 일하러 가기 바쁘게 모두 꺼내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접심을 굶었다.
먹을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형이 동생밥을 훔쳐먹기도 하고 동생이 형의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나는 처음에는 타이르다가 나중에는 속이 타서 화를 내고 심지어 어린 자식들을 두둘겨 패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 절박한 것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굶겨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애들이 하루 한끼만 배불리 먹고 다음 두끼는 굶는 비정상적인 식습관을 지속하다가, 나중에는 허약해지고 또 그 허약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간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비록 풀에다가 옥수수가루를 조금 넣고 끓인 영양가 없는 음식이지만 그것이라도 자식들에게 정상적으로 먹이려고 애썼다.


나는 어린 자식들이 아침에 점심저녁밥까지 먹어치우는 비정상적인 음식섭취와, 굶주림으로 왕성해진 애들의 식욕을 절제시키는 싸움에 매까지 들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 자살해 죽을 생각도 몇 번씩이나 했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달팠다.
허지만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탈북자 이 영갑

?

  1.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10]

    10. 인간의 조건 중국의 대도시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농민공이다. 농민공이란 농민출신의 노동자들을 말한다. 농촌에서는 돈을 벌기가 어려워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친척들이나 한 고장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
    Date2014.01.23 By허태섭북한연구가
    Read More
  2. No Image

    장성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아하고 호젓한 모습으로 어둠을 불태우는 촛불, 시인들의 단골용어로 쓰이던 촛불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먼저 사용한 것은 북한사회이다. 80년대 수만명의 청년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수령 만세와 충성 맹세를 외치며 김일성광장을 꽉 메우고 행진하는...
    Date2013.12.17 By허태섭북한연구가
    Read More
  3. No Image

    과장동지의 슬픔 (북한사회 이야기)

      최재호는 40년 세월을 당 간부로 사업한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에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당 간부로 임명받은 후 40대 초반부터는 당위원회 당원등록과장으로 승진하여 명예도 조금씩 맛보며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는 항상 자신을 자부하며 살았...
    Date2013.11.28 By허태섭북한연구가
    Read More
  4.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9]

    심양시의 밤거리   9. 유린의 덫,   나는 소가툰에 있는 한국인 사장의 노랫방에서 도망친 후에도 며칠동안 방황했다. 밖에서 자고, 하루 만두 한개를 사 먹으며 일자리를 찾아 헤멨다. 일자리를 찾아야 거처할 곳도 생기는 것이 나의 처지였다. 며칠동...
    Date2013.11.19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5.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8]

    8. 심양시에서 내가 흑룡강성의 오상시에서 선화 할머니의 딸을 따라 심양시로 갔을 때는 2003년 3월이었다. 선화 할머니의 딸은 심양시에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서탑가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이모라고 불렀다. 그는 몇 년전에 남편과 이혼 하고 초중...
    Date2013.11.13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6. No Image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7]

        7. 선화 할머니   흑룡강성 오상시와 그 주변 농촌에는 택시가 적었다. 그 곳 사람들은 택시대신 삼륜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했다. 삼륜오토바이에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비닐방막을 씌우고 거기에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군 했다. 삼륜 오토바이는 택시...
    Date2013.11.04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7. No Image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6]

             중국농촌집의 주방 (부뚜막)    6. 도망   북한여자들이 팔려가면, 중국인 남자들은 처음에는 중국어를 배워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팔려온 북한여자들이 중국말을 알면 도망친다는 인식, 낡은노예제도의 주인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북한여자...
    Date2013.10.25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8.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 5 ]

        5. 금화언니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의 특산물은 쌀이다. 중국어로 "우창따미"라고 말하는 오상 흰쌀은 베이징을 비롯한 대 도시의 관료들과 부자들만 먹는다고 했다. 쌀의 질이 좋고 그래서 값이 비싸다는 얘기다. 오상에서 생산되는 쌀은 생긴 ...
    Date2013.10.14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9.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4]

       중국 흑룡강성의 농촌부락    4. 인간 경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밤새 달려 다음 날 오전 아홉시경에 흑룡강성 오상시의 한 농촌부락에 도착했다. 오상시는 산지가 대부분인 연변지역과 달리 무연한 벌이었다. 오상을 중국어로는 "우창"이라고 말한...
    Date2013.10.04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0.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3]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된 탈북여성들.   3, 우리는 악당들의 사냥감이었다.   나는 그해가을, 정확히 2002년 9월 나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한 중국인 농민에게 팔려갔다. 몇개월 동안 나를 농락한 조선족 주인은 마누라의 독살스러운 눈길에 지친듯 ...
    Date2013.10.01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1.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2]

      2. 타향의 설움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너무도 궁핍한 북한과는 전혀 다른 곳이 중국이었다. 사람들은 쌀밥과 고기를 마음대로 먹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몸집이 좋았다. 북한식으로 이야기하면 남자들은 모두가 당 ...
    Date2013.09.20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2. 겨울 잎사귀(탈북수기) [1]

         1. 아버지의 그림     나는 고향을 떠난지 10년이 된다.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온성군의 자그마한 탄광마을이었다.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거뭇거뭇한 석탄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두만강 유역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그 곳에는 모든 것이 거...
    Date2013.09.17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3. 한인 인권목사와 중국노인

      북한의 대규모 철광석 생산 기지인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쪽 방향으로 백리쯤 가면 중국 연변지역에서 꽤 알려진 경흥탄광이 있다. 중국어로는 칭씽 메이쾅이라고 말한다. 중국 길림성 화령시에서 남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산속인 그곳에...
    Date2013.08.29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4. 밥 한 그릇 때문에 (탈북수기) 3

      아홉살인 둘째 아들을 얼울하게 저세상으로 보낸뒤, 주면사람들은 나를 보고 멍청해졌다는 말을 자주했다. 나도 자신이 전과 달리 삶에 대한 욕망이 깡그리 없어지는 것을 종종 느꼈다.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둘째아들을 때없이 생각하면서...
    Date2013.08.26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5. 밥 한 그릇 때문에 (탈북수기) 2

      그날 나는 이웃 농촌부락으로 장사를 떠났다. 죽은 아내가 평소에 입던 옷가지들과 나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농촌에 가서 옥수수 몇 키로를 바꾸어 오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 저녁에 늦게 돌아올 것을 예견하여 어린 세 자식들의 ...
    Date2013.08.22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6. 밥 한 그릇 때문에 (탈북수기) 1

      나는 북한에서 살 때 비교적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어리숙하다는 뜻이다. 북한정권은 주민들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고지식은 미덕이라는 교육을 많이 했다. "장군님(김정일)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의심...
    Date2013.08.20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7. 북한정권이 먼저 할 일과 후에 할 일

    2003년에 북한에서 있은 일이다.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최악의 식량난속에 북한주민들의 탈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였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중세관들에는 중국공안에 잡힌 탈북자들이 매일같이 꼬리를 물고 북송되군 했다.   그들은 보위부(...
    Date2013.08.07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18. 탈북자들과 북한사회의 관계

    2009년 북한에서 진행된 화폐개혁 이후의 일이다. 당시 북한정권의 착오적인 화폐개혁의 후과로 주민들의 삶은 15년 전으로 되돌아 갔다.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90년대처럼 모든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보따리 장사와 힘겨운 노동으로 아득바...
    Date2013.07.31 By허태섭북한연구소장
    Read More
Board Pagination ‹ Prev 1 Next ›
/ 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