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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BS

3년 전 드라마 '싸인'에 흠뻑 빠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의관'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였죠. 다소 작위적이거나 과장된 내용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탄탄한 취재와 생생한 묘사에 매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드라마 '싸인'을 보면서 두 가지를 느꼈었습니다. 우선 법의학과 이를 토대로 수사를 돕는 법의관의 중요성입니다. 갈수록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현대 수사의 흐름상 법의관들의 활동은 점점 더 수사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찾아낸 체모 한 오라기, 침 한 방울, 혈흔의 모양, 그리고 시신이 알려주는 정황들을 통해 밝혀낸 사실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래서 법의관들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법의관이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로든 증거 조작을 한다면 사건은 미궁에 빠지거나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의학이 양심을 버릴 경우 그 결과는 더욱 치명적입니다. 다른 수사조작은 사실을 일시적으로 숨길 뿐입니다. 하지만 법의관이 증거 조작에 나서면 사실 자체가 바뀝니다.드라마 싸인에서 배우 박신양이 분한 법의관 윤지훈은 이런 갈등에 휩싸입니다. 절대 권력자의 딸이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양한 압력이 가해지고 사실을 밝혀내려는 윤지훈의 노력은 거듭 좌절됩니다. 상위 직급의 법의관이 권력의 요구에 응해 과학수사의 결론을 조작하면서 사건의 실체는 왜곡되고 맙니다. 그래서 윤지훈은 자신의 생명을 미끼로 던져 증거를 확보하고 결국 죽어야 했습니다. 법의학이 지켜내야 하는 원칙과 도리를 목숨을 바쳐 외친 것이었습니다.최근 중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숨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만 한 저명한 법의학자가 자신의 모든 직위를 던지며 중국 법의학계에 '양심을 되찾으라'고 외쳤습니다. 주인공은 올해 57세의 왕쉐메이, 여성 법의관 가운데 최고참이자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 받는 인물입니다.

방송에도 종종 출연해 사건의 증거를 과학적으로 해석해줌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법의학자입니다. 심지어 그녀를 모델로 한 TV 드라마도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현역 중국 법의학회 부회장이고 중국 최고인민검찰원기술정보센터 주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7일 한 장의 성명서를 내면서 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성명에서 왕 주임은 터무니 없는 결론을 내리는 중국 법의학회에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무책임한 결정을 하는 법의학회에 종사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법의학에 있어 최고 감찰 기관이 돼야 할 최고검찰원기술정보센터가 점점 더 자주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리고 허위의 색이 짙어지는 모습을 보며 실망을 넘어 이제 절망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이런 상황을 고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한 만큼 물러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강조했습니다.

왕 주임은 법의학이 사건의 실체를 왜곡한 사례로 왕위에 사건을 들었습니다. 대학생이었던 왕위에는 지난 2010년 8월 베이징의 한 지하철 역에서 철로에 떨어져 숨졌습니다. 당시 법의학 조사팀은 왕씨가 철로에 흐르는 750 와트의 고압전류에 감전돼 목숨을 잃었다며 단순 사고사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왕씨의 어머니는 이런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왕씨의 피에서 술이나 약을 섭취한 흔적이 나오지 않은 만큼 아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철로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왕씨가 철로로 떨어지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역사 내 폐쇄회로 화면이 고장이 나서 녹화되지 않았다며 제공되지 않은 점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왕씨의 어머니는 재수사를 요청하면서 왕쉐메이에게 이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조사에 나선 왕쉐메이는 왕씨의 오른쪽 아래턱에서 3밀리미터 크기의 수상한 상처를 찾아냅니다. 둔기에 얻어맞은 흔적이었습니다.

왕쉐메이는 왕씨가 몸의 좌측부로 쓰러진 만큼 떨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렇다고 역내에 이런 상처를 낼 만한 다른 물체도 없었습니다. 왕쉐메이는 따라서 왕씨가 턱을 둔기로 가격당한 뒤 철로로 떨어진 것으로 봐야하고 따라서 형사 사건으로 수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중국 법의학계는 이런 왕 주임의 주장을 깨끗이 무시하고 기존 결론을 고수했습니다.왕 주임은 지난 해에도 중국 거물 정치인인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의 살인 사건을 놓고 중국 법의학계와 대립한 바 있습니다. 중국 법의학 수사팀은 구카이라이가 청산가리를 이용해 영국인 사업가를 독살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왕 주임은 영국인의 몸에 청산가리에 중독됐을 때 나타나는 혈흔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만큼 이런 결론을 잘못됐다고 반박했습니다. 설사 구카이라이가 실제 청산가리를 투입했더라도 치사량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살인자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왕 주임의 이런 주장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정부 당국에 의해 바로 삭제 당하고 심한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왕 주임은 이와 같이 과학적 조사와 결론이 권력이나 금력에 의해 너무나 쉽게 왜곡되고 뒤바뀌는 현실에 절망했다고 호소했습니다. 중국의 인터넷 독립 언론들도 이런 왕 주임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이른바 법의학에 의한 과학적 결론이라고 발표된 사실들이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난 사례가 한두 가지냐고 따졌습니다. 중국의 과학 수사 관련 기구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그나마 행해지는 과학 수사조차 믿을 수 없다면 수사의 정의를 어떻게 담보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드라마 '싸인'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 우연히 국과수 인사의 드라마평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이 국과수의 활동을 잘 알게 됐다는 점에서, 또 우리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드라마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도 "반면 이 드라마로 인한 걱정과 고민도 크다. 많은 국민들이 국과수의 수사 결론이 이해관계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됐다는 점 때문"이라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법의학은 수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증명해내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 보루가 흔들리면 수사의 신뢰는 더이상 지켜질 수 없습니다. 드라마 '싸인'에서 윤지훈이, 또 현실의 중국에서 왕쉐메이가 절규하며 외친 '법의학의 양심'이 태산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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