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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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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가족] 휴가와 전쟁

▶ 여행을 함께 가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낯선 시공간에 놓이면 가려져 있던 본성이 더 쉽게 드러나거든요. 휴가를 떠난 부부 여러분, 혹시 싸우고 돌아오셨나요? 부부라도 다를 수 있겠죠.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이를 극복하는 모습이 다르고, 편안함을 느끼는 기준도 다른가 봐요. 평소 금실 좋기로 소문난 3년차 부부도 휴가 때만은 티격태격한다네요!

결혼 3년차의 여름. 올해도 남편과의 여름휴가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바닷가 휴양지인 타이 푸껫에 가는 걸로 타협을 보았는데, 제가 피피 섬 투어에 스노클링을 하자니까 남편은 그저 우리 호텔 해변에서 타월 깔고 누워서 쉬자네요.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켜봅니다. 아니, 내가 큰맘 먹고 자기 좋아하는 데로 가자고 했는데! 시간은 무릇 한정되어 있고 앞으로 언제 또 푸껫에 가게 될지 모르건만, 이렇게 태평스러워도 되는 건가요? 남편은 툴툴대는 제 앞에서 벌써 지친 표정입니다. 험난한 세속을 벗어나 쉬러 가는 건데 좀 여유롭게 지내면 안 되느냐고 말입니다.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도 아니고 여행지에서까지 빡빡한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맞서 화를 냅니다.

급기야 언성을 높이고, 부부 싸움에서 그토록 금기라던 지난 이야기-주로 작년과 재작년 휴가 때 섭섭했던 일들-를 꺼냅니다. 스르르 잊혔던 지난 휴가 때의 불만들이 각자의 머릿속에서 실시간 다시보기 기능으로 재생됩니다. 저는 오전에 꼭 갈 곳이 있었는데 남편이 늦잠을 자느라 못 갔던 일을 얘기하고, 그는 두 시간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쇼핑몰을 도는 저를 따라다녔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논합니다. 남편은 피곤해 죽겠는데 꼭 멀리 나가서 맛집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제가 답답했다고 말하고, 저는 애써서 온 여행지에서 티브이 채널 돌리기 바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반격합니다. 아니, 이 한심한 부부는 왜 여름휴가를 앞두고 다투기부터 하느냐고요?

여기 대도시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도시에는 여자가 좋아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그리고 쇼핑몰이 꼭 있거든요. 대중교통도 잘 발달해 있어 어디든 저렴한 교통비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숙소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서 깨끗하고 실내 장식도 예쁜 호텔을 고를 수 있고요. 길을 걷다 지치면 들어가 쉴 수 있는 카페가 수시로 나타나 여자의 카페인 부족분을 충전해 줍니다. 한국 여자들의 블로그 파워에 힘입어 맛집 찾기도 어렵지 않다네요.

그리고 여기, 산과 바다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아니, 박물관이며 미술관이 다 뭡니까. 여행 중에 왜 공부를 하러 가나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경관을 눈에 담으러 가야죠. 해안고속도로를 정처 없이 달리다 보면 탁 트인 비경이 나오고, 그 자리에 차를 세워 몇 시간이고 늘어지게 쉽니다. 내키면 헤엄도 좀 치고요. 숙소요? 길 가다가 민박 간판이 보이면 들어가는 겁니다. 수돗물 잘 나오고 지붕 튼튼하면 충분하지요. 지치면 호주머니 속 나를 위한 담배 한 개비가 있고, 신이 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나와서 먹는 컵라면 맛은 별 다섯개짜리 레스토랑 못지않습니다.

휴가 때 타이 푸껫 가서 

섬투어에 스노클링 하자니까 

해변에서 누워 쉬자는 남편 

언제 또 동남아 갈 줄 알고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건지   

엑셀로 여행 일정 만들어 

효율적으로 다니는 나와 달리 

산과 바다 노닐며 세속 떠나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그 

이번 여름휴가도 전쟁이 될까
 

우리 부부는 여행지에서 보내는 하루도 대조적입니다. 저는 아예 엑셀로 여행 일정을 만들어 출력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앱이 있어서 그걸로 대신하고요. 아침 기상은 8시이며, 오전은 어디에서 보내고 점심은 그 근처의 어디에서 해결할지, 동선을 따져봤을 때 오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효율적일지 다 정해져 있는 일정이 빽빽하기 그지없습니다. 남편이요? 계획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우적우적. 비유하자면 저의 여행 스타일은 가로세로줄이 빈틈없이 그어진 모눈종이고, 남편의 여행 스타일은 표지만 살아 있는 무지 노트인 셈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다 보니,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지난여름과 지지난 여름의 슬픈 추억이 떠오릅니다. “남편, 어디 가고 싶어?” 물으면 남편이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자기 좋은 데 아무 데나.” 반신반의하면서도 향긋한 콧소리 조금 섞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부산 어때? 나 감천 문화마을 보고 싶어. 씨앗호떡도 먹으러 가고 싶고.” 이런, 남편이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동해안 아무 데나 가면 안 되나? 저녁에 근처에서 회도 먹고 말이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내가 좋은 곳 아무 데나 간다며!” 분란을 일으키기 싫은 남편이 눈치를 보더니 얼른 대답합니다. “알았어, 그럼 해운대 가서 쉬자.” 그런데 이 대답이 더 싫은 거 아시죠. 불씨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펑. 폭발합니다. “해운대 모래밭에서 또 잠만 자려고 그러지! 싫어! 난 국제시장 구경도 하고 씨앗호떡에 밀면까지 다 먹고 올 거야!”

피피 섬에 못 갈까 봐 토라져 있다가 슬쩍 어깨너머로 남편을 훔쳐봅니다. 배고플 텐데, 치킨이라도 시켜먹자고 할까 고민하던 중 문득 좋았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남편과 함께하는 여행이 꼭 그리 답답하고 지루하지만은 않았음을 잘 알고 있거든요. 예전에 제가 숙소 예약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을 때 허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남편의 느긋함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화가 나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온 남편도 슬쩍 제 눈치를 봅니다. 그럼 그렇지. 나의 정보력 없이는 기껏 나간 해외인데 호텔 방에서 맥주에 감자칩만 먹다가 여행이 끝나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지요. 낯선 곳에서 막막할 때마다 이곳의 관광 명소는 어디고, 별미는 무엇인지 재잘대는 저의 꼼꼼함이 이 남자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치킨과 생맥주가 배달되자 남편이 윤기 흐르는 닭 다리를 찢어 내미네요. 피피 섬 투어도 가고, 팡응아만 섬도 가자고 꼬리를 내립니다. 팡응아만 섬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또 말은 잘합니다. “스마트폰이 있는데 뭘, 오빠한테 그 정도는 껌이지. 그 섬이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왔던 건 알아?” 으쓱대는 남편의 목소리가 갓 튀긴 닭 껍질처럼 착착 감겨듭니다. 생맥주를 따라주며 딱 하루만 투어를 하고, 나머지 2박은 해변에서 놀자! 마침내 대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어휴, 올해 여름휴가도 이렇게 넘어가는군요!

결혼 전에는 서로 다른 여행 스타일이 문제가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둘이서만 놀러 갈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들 무엇이 대수인가요. 부모님 몰래 성공적으로 가기만 해도 대박인걸요. (저희 아버지는 지금도 대학 동기들하고 간 줄 아시는) 제주도에서도, 강원도 영월의 어느 펜션에서도, 저와 남편에게는 서로의 얼굴만 보였더랍니다. 장소가 어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두 사람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단 말이지요. 대체 그때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요? 

신혼여행 가서는 왜 안 싸웠는지 신기한 주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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